추상 표현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
추상이라 함은
구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표현이라 함은 재현적이지 않다를 뜻합니다.
색체와 형태의 해방.
이러한 의도에서 로스크의 작품세계가 탄생했다.
본인의 내면세계를
자신만이 아닌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가장 함축적으로 소통의 형태를 추구하며 탄생되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
10살때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오래곤주 포틀랜드에 정착하였다.
유대인 전통적인 교육을 받은
명석한 로스코는
1921년 예일대학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공부하였으나
차별과 기득권층의 폐쇠주의로
2년간의 예일에서의 학업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방황하던 그는 Art Student League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그의 미술인생이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미술수업을 들었으며,
초기에는 세잔을 연상시키는 조형적인 스타일로
작업을 하였다.
1920년 후반에
러시아계 유대인이라는 공통점으로
친말힌 사이가 된 막스웨버로 부터
추상미술의 의의와 표현법을 배웠다.
또한
Milton Avery를 만나
색채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초창기 실험적 시도는
그는 전통적인 표현방식을 거부하고
주제에 대한 감정적 접근을 강조하고
의도적인 변형과 조잡한 물감을 적용하는
스타일을 채택하였다
그의 작품세게는
신화시대를 거쳐 실존주의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란 책을 늘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1936, Self Portrait
1937 Street Scene
1937, Subway
1940, Subway
1944, Gethsemane
1946, Sea Fantasy
.
1948
1948
1949, No 8
가난한 이민자 출신의 자존심 강한 반골.
그러나 그의 호전적 성격과는 달리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세계는
명상적이고, 종교적이었다.
오랫동안의 의지적 노력 후에
1949년 경에 그의 표현방식을 완성하였다.
두차례의 전쟁 후
피패한 인간의 감정에 로스코의 표현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시각언어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아름다움과 감동의 극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재현이라는 방식을 사용해야 하느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로스코의 그림에서
구체적 형상이 사라진 대신 빛을 발하는
색들로만 채워졌다.
그의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성화처럼
성스럽게 다가왔다.
로스코는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독특한 그림은 소통을 극한으로 다가가기 위한
집념의 결과물 이었고
화가의 작품은 명료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상업적 성공을 거둔 로스코는 옛날의 호전성을 잃고
그토록 비난했던 해악을 스스로 범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쌓였다.
긴장감과 신경쇠약에 빠진 로스코는
명성 유지에 집착하였다.
젊은 팝아트의 작가들의 위협적인 부상과 함께
어느새 완고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엘리트적인 미술이 되었다.
앤디월홀과 리히텐슈타인와 같은 젊은 아티스트에게
협잡꾼같은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1949, Untitled
1951, No 2
1953, Untitled
1953, Untitled
1954, Orange & Tan
로스코의 작품은 그의 우울증을 반영하듯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의 작품에 대한 그의 설명은 죽음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렇게 67세의 일기로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그렇게 걱정하였던 그의 명성은 작품과 함께 그대로 남았다.
1969, Untitled
1969, Untitled
로스코의 마지막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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